세르비아 군정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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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르비아 군정청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이 유고슬라비아 침공 이후 세르비아 지역에 설치한 군정 체제였다. 1941년 유고슬라비아 분할 이후, 세르비아 본토와 바나트, 코소보 북부를 포함한 지역을 독일군이 점령하여 군정청의 통치를 받았다. 독일은 이 지역을 주요 수송로와 자원 확보를 위한 거점으로 삼았으며, 세르비아 군정청은 독일의 지배를 받으며 행정을 담당했다. 군정청은 괴뢰 정부를 세우고 협력 세력을 활용하여 저항을 억압하는 한편, 유대인과 로마인을 대상으로 한 인종 차별 정책을 시행하여 강제 수용소를 운영하며 많은 인명을 살상했다. 1944년 붉은 군대와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의 진격으로 붕괴되었으며, 전후 협력자들은 전범 재판을 받았다.
세르비아 군정청의 공식 명칭은 세르비아 군사령관 관할 지역이었다. 자료에서는 다음과 같은 다양한 용어로 지칭하고 있다.
2. 명칭
3. 역사
3. 1. 1941년
3. 1. 1. 침공과 분할
1941년 4월, 독일과 그 동맹국들은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침공하고 점령했으며, 이후 유고슬라비아는 분할되었다. 일부 유고슬라비아 영토는 동맹국인 추축국인 헝가리 왕국, 불가리아 왕국, 이탈리아 왕국에 의해 합병되었다. 독일은 전쟁 전의 크로아티아 바노비나의 대부분과 오늘날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나머지 지역 및 인접 영토로 구성된 괴뢰국인 크로아티아 독립국(네자비스나 드르자바 흐르바츠카/Nezavisna Država Hrvatskahr, NDH)의 창설을 조작하고 지원했다. 이탈리아, 헝가리, 불가리아는 유고슬라비아 영토의 다른 지역을 점령했다. 독일은 유고슬라비아 영토를 병합하지 않았지만, 오늘날의 슬로베니아 북부를 점령하고 NDH 북부에 주둔군을 배치했다. 독일이 점령한 슬로베니아는 인접한 가우 카린텐 및 가우 슈타이어마르크의 가울라이터의 행정 아래에 놓인 두 개의 행정 구역으로 나뉘었다.
세르비아 본토, 코소보 북부(코소브스카 미트로비차 주변), 바나트로 구성된 나머지 영토는 독일군에 의해 점령되어 독일 군정의 행정 아래에 놓였다. 이는 이곳을 통과하는 주요 철도 및 다뉴브 강 수송로와 귀중한 자원, 특히 비철 금속 때문이었다.
3. 1. 2. 군정 수립
독일 육군 최고 사령부(OKH)는 점령 지역에 적용되는 법률을 발표했다. 1941년 4월 20일, 헬무트 푀르스터 공군 대장이 세르비아 군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군사령관 참모는 군사 및 행정 부서로 나뉘었고, 지역 사령부와 지구 사령부가 구성되었다. 프란츠 노이하우젠, 펠릭스 벤즐러, 빌헬름 푸흐스 등 고위 인물들이 베오그라드에 주둔했다. OKH 포고는 폭력 행위, 파괴 행위에 대한 엄중한 처벌, 무기 항복, 통신 제한 등을 명령했다.
3. 1. 3. 공산당의 준비
유고슬라비아 공산당(KPJ)의 중앙 위원회는 1941년 4월 10일 사무총장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이끄는 군사위원회를 임명했다. 4월부터 KPJ는 반란을 일으킬 기회를 준비하는 군사위원회를 포함하여 전국에 걸쳐 지하 조직망을 갖추었다. 5월, KPJ는 "유고슬라비아의 모든 민족 간의 단결과 형제애, [그리고] 외국 적과 그들의 국내 조력자에 대한 끊임없는 투쟁은 순수한 생존의 문제"라는 정책을 개략적으로 설명했다. 6월 4일, 군사 위원회는 파르티잔 최고 사령부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3. 1. 4. 드라자 미하일로비치의 초기 활동
4월 말, 유고슬라비아군 대령 드라자 미하일로비치와 항복 명령을 따르지 않은 약 80명의 병사들은 드리나 강을 건너 점령지, 즉 현재 크로아티아 독립국(NDH)의 일부가 된 북부 보스니아의 도보이 지역에서 육로로 이동해 갔다. 5월 6일, 우지체 근처를 지나가던 이 소규모 부대는 독일군에게 포위되어 거의 전멸할 뻔했다. 그의 부대는 흩어졌고, 라브나 고라의 고립된 산악 고원에 도착했을 때 그의 부대는 34명의 장교와 사병으로 줄어들었다. 미하일로비치는 지역 주민들과의 유대 관계를 맺고, 이 지역의 헌병대의 관용을 통해 자신의 미래 행동을 고려할 수 있는 비교적 안전한 지역을 만들었다. 라브나 고라에 도착한 직후, 미하일로비치의 부대는 "유고슬라비아군 체트니크 부대"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5월 말까지 미하일로비치는 독일군이 철수하거나 패배할 때 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위치에 있기 위해 유고슬라비아 전역에서 가능한 많은 무장 단체를 장악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장기적인 전략을 채택하기로 결정했다.
3. 1. 5. 판무관 정부 수립
히틀러는 잠시 세르비아 국가의 모든 존재를 지우는 것을 고려했지만, 이는 곧 포기되었고 협력 정권을 이끌 적합한 세르비아인을 찾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전 유고슬라비아 총리 드라기샤 츠베트코비치, 이전 유고슬라비아 외무장관 알렉산다르 친차르-마르코비치, 이전 유고슬라비아 내무부 장관 밀란 아치모비치, '준파시스트' 연합 노동 기구(Združena borbena organizacija radasr-Latn, 또는 ''Zbor'')의 회장 디미트리에 료티치, 그리고 베오그라드 경찰서장 드라고미르 요바노비치의 임명을 고려했다. 푀르스터는 아치모비치를 선택했는데, 그는 1941년 5월 30일에 10명의 판무관으로 구성된 판무관 정부를 구성했다. 그는 료티치가 '세르비아인들 사이에서 의심스러운 평판'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를 피했다. 아치모비치는 격렬한 반공주의자였으며 전쟁 전에 독일 경찰과 접촉했었다. 다른 9명의 판무관은 스티븐 이바니치, 모므칠로 얀코비치, 리스토 요이치, 스타니슬라브 요시포비치, 라조 M. 코스티치, 두샨 레티차, 두샨 판티치, 예브렘 프로티치, 밀리사브 바실리에비치였으며, 육군 및 해군부를 제외한 각 유고슬라비아 부처를 담당하는 판무관이 한 명씩 있었다. 여러 판무관들이 전전 유고슬라비아 정부에서 장관직을 맡았으며, 이바니치와 바실리에비치는 모두 ''Zbor''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판무관 정부는 "점령 정권의 단순한 도구로서 터너와 노이하우젠의 통제하에 있는 낮은 등급의 세르비아 행정부"였으며, "어떠한 권력의 모습도 갖추지 못했다". 아치모비치 행정부가 구성된 직후, 미하일로비치는 료티치에게 그의 진행 상황을 알리고 그가 독일을 공격할 계획이 없다는 것을 보장하기 위해 한 명의 하급 장교를 베오그라드로 보냈다.
행정부의 첫 번째 임무 중 하나는 점령 지역 내 모든 유대인과 롬의 등록 및 그들의 활동에 대한 엄격한 제한을 시행하라는 터너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명령의 이행은 독일 군정청이 감독했지만, 아치모비치와 그의 내무부는 이를 수행할 책임이 있었다. 그러한 임무를 수행하는 주요 수단은 세르비아 헌병대였으며, 이는 영토에 남아 있는 이전 유고슬라비아 헌병대 부대, ''드린스키'' 및 ''두나브스키'' 연대의 요소를 기반으로 했다. 세르비아 헌병대장의 직무 대행은 요반 트리시치 대령이었다.
1941년 5월 동안 푀르스터는 모든 인쇄 장비의 등록 요건, 언론에 대한 제한, 극장 및 기타 오락 시설의 운영, 생산 재개 등을 포함한 수많은 명령을 내렸다. 그는 또한 유고슬라비아 국립 은행을 해산하고 이를 대체하기 위해 세르비아 국립 은행을 설립했다. 5월 중순, 아치모비치의 행정부는 세르비아 국민이 "위대한 이웃인 독일 국민과의 진심으로 충성스러운 협력"을 원한다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전 유고슬라비아의 군과 구역의 대부분의 지역 행정관들이 그대로 자리를 지켰고, 독일 군정청은 지역 당국을 감독하기 위해 각 수준에 자체 행정관을 배치했다. 푀르스터는 그 후 ''제1 항공군단''의 지휘관으로 전출되었고, 6월 2일에는 또 다른 루프트바페 장교인 ''항공병 대장'' 루드비히 폰 슈뢰더가 그를 대신했다.
3. 1. 6. 아치모비치 행정부의 어려움
세르비아 군정청의 행정관들은 담당 분야, 정치 또는 일반적인 공공 행정에 있어 상당한 경험을 갖추고 있었지만, 아치모비치 행정부는 실제로 통치할 힘이 없었기 때문에 극도로 어려운 입장에 놓여 있었다. 아치모비치 행정부의 세 가지 주요 임무는 독일 점령에 대한 주민들의 묵인을 확보하고, 서비스 복구를 돕고, "공공 서비스에서 부적격자를 식별하고 제거하는 것"이었다. 크로아티아 독립국에서의 박해를 피해 도망치는 난민과 불가리아가 병합한 마케도니아, 코소보, 그리고 헝가리가 점령한 바치카와 바라냐에서 도망치는 다른 사람들이 이 지역으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1941년 6월 말, 아치모비치 행정부는 바나트 행정에 관한 조례를 발표했는데, 이는 본질적으로 이 지역을 ''폴크스도이체'' 지역 지도자 제프 얀코의 통제하에 있는 별도의 민간 행정 구역으로 만들었다. 바나트는 형식적으로 아치모비치 행정부의 관할 하에 있었지만, 실제로는 판체보의 군사 지역 사령부를 통해 군정의 지휘를 받으며 베오그라드로부터 상당히 자율적이었다.
3. 1. 7. 저항의 시작
1941년 7월 초, 소련에 대한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작된 직후, 독일군과 아치모비치 당국에 대한 무장 저항이 시작되었다. 이는 요시프 스탈린과 코민테른의 호소에 대한 응답이었으며, 7월 4일 베오그라드에서 열린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회의에 이은 것이었다. 이 회의에서는 전반적인 봉기로 전환하고, 파르티잔 전투 부대를 조직하여 무장 저항을 시작하며, 유고슬라비아 전역에서 점령군에 대항하여 봉기할 것을 대중에게 촉구하기로 결정했다.
7월 7일 벨라 크르크바 마을에서 첫 번째 교전이 발생하여 헌병들이 공개 회의를 해산하려 하자 헌병 2명이 사망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헌병 기지와 순찰대가 공격받았고, 독일 차량에 총격이 가해졌다. 무장 단체는 처음에는 토폴라 북서쪽에 있는 아란젤로바츠 구역에 나타났다.
7월 말, 슈뢰더가 항공기 사고로 부상을 입고 사망했다. 세르비아의 새로운 독일 군 사령관인 공군 게네랄 데어 플리거/General der Fliegerde 하인리히 단켈만은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더 많은 독일군이나 경찰을 확보할 수 없게 되자, 이용 가능한 모든 옵션을 고려해야 했다. 단켈만은 가능한 한 무자비하게 가용 병력을 활용하라는 지시를 받았기 때문에, 터너는 단켈만이 아치모비치 행정부를 강화하여 반란 자체를 진압할 수 있도록 제안했다. 7월 29일, 16세 유대인 소년이 베오그라드에서 독일 수송 차량에 방화 공격을 가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Einsatzgruppe Serbien''은 유대인 100명과 공산주의자 22명을 처형했다. 8월까지 약 10만 명의 세르비아인이 우스타셰의 박해를 피해 NDH에서 점령 지역으로 건너왔다.
3. 1. 8. 세르비아 국민에게 보내는 호소
반란에 대응하여, 아치모비치 행정부는 545명 또는 546명의 저명하고 영향력 있는 세르비아인들에게 8월 13일과 14일에 독일이 승인한 베오그라드 일간지인 ''노보 브레메(Novo vreme)''에 게재된 세르비아 국민에게 보내는 호소에 서명하도록 권고했다. 서명자에는 세 명의 세르비아 정교회 주교, 네 명의 수석 사제, 최소 81명의 베오그라드 대학교 교수들이 포함되었지만, 역사가 스테반 K. 파블로비치에 따르면 많은 서명자들이 서명을 강요받았다. 이 호소는 세르비아 국민들에게 공산주의 반군과의 투쟁에서 당국을 모든 면에서 돕도록 촉구하고, 나치에 대한 충성을 요구하며, 파르티잔이 이끄는 저항을 비애국적이라고 비난했다. 세르비아 변호사 협회는 이 호소를 만장일치로 지지했다. 아치모비치는 또한 공산주의자들의 아내와 16세 이상의 아들을 체포하여 구금하고, 독일군은 그들의 집을 불태우고 통행금지를 부과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3. 1. 9. 저항의 격화
아치모비치 행정부는 1941년 7월 1일부터 8월 15일 사이에 246건의 공격을 받았으며, 82명의 반군을 사살하는 대신 26명이 사망했다. 독일군은 공격에 대응하여 인질을 사살하고 마을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8월 17일, 제704보병사단 제724보병연대 소속 한 개 중대는 우지체 인근 전투에서 공산주의자 15명을 사살한 후, 구호품을 갇힌 공산주의자에게 밀수했다는 혐의로 체포된 23명을 더 사살했다. 처형된 남성 19명의 시신은 우지체 기차역에 매달렸다. 8월 말, 살로니카에 주둔한 제164보병사단의 제433보병연대는 대대 하나를 바더의 지휘에 배속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8월 동안, 세르비아 행정부와 헌병대, 철도 노선, 전화선, 광산 및 공장에 대한 242건의 공격이 있었다. 베오그라드-우지체-추프리야-파라친-자예차르 철도 노선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반란이 급격히 확대되었음을 보여주는 징후는 그 달 마지막 10일 동안 135건의 공격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독일군 자체는 22명이 사망하고 17명이 부상당했다. 그 달 말까지 사살되거나 교수형에 처해진 공산주의자와 유대인의 수는 1,000명에 달했다. 8월까지 이 지역의 파르티잔 수는 약 14,000명으로 증가했다.
3. 1. 10. 국가 구원 정부 수립
벤츨러의 요청에 따라 외무성은 독일의 요구 사항을 충족하는 새로운 괴뢰 정부를 수립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SS-Standartenführer' 에드문트 베제마이어를 보냈다. 베제마이어는 5개월 전 크로아티아 독립국의 선포를 주도했다. 베제마이어는 베오그라드의 독일 사령관 및 관리들과 일련의 협의를 진행했고, 새로운 괴뢰 정부를 이끌 수 있는 여러 후보들을 인터뷰한 다음, 전 유고슬라비아 육군 및 해군 장관인 밀란 네디치 장군을 최적의 인물로 선정했다. 독일군은 불가리아군과 헝가리군을 점령 지역으로 투입하고 그를 전쟁 포로로 독일에 보낼 것이라는 위협을 포함하여 네디치에게 그 직책을 수락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상당한 압력을 가해야 했다. 대부분의 유고슬라비아 장군들과 달리 네디치는 항복 후 독일에 억류되지 않았고, 대신 베오그라드에서 가택 연금되었다.
1941년 8월 27일, 약 75명의 저명한 세르비아인들이 베오그라드에서 회의를 열어 네디치가 임시 정부를 대체할 국가 구원 정부(Vlada Nacionalnog Spasa/Влада Националног Спасаsr-Cyrl)를 구성해야 한다고 결의했다. 같은 날, 네디치는 단켈만에게 다섯 가지 조건과 몇 가지 추가 양보를 바탕으로 새 정부의 총리가 될 것에 동의한다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이틀 후, 독일 당국은 네디치와 그의 정부를 임명했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계속 독일 점령군에 있었다. 단켈만이 네디치의 조건을 수락했는지에 대한 서면 기록은 없지만, 네디치 정부가 세르비아 국가 및 국가 문장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을 포함하여 요청된 일부 양보를 했다. 각료 회의는 네디치, 아치모비치, 얀코비치, 오그넨 쿠즈마노비치, 요시프 코스티치, 판타 드라시키치, 류비샤 미키치, 체도미르 마르야노비치, 밀로스 라도살례비치, 미하일로 올찬, 밀로스 트리부나츠, 요반 미유슈코비치로 구성되었다. 장관들은 네디치와 긴밀하게 연관된 사람들, 료티치의 동맹, 아치모비치와 같이 세 가지 광범위한 그룹으로 나뉘었다. 외무부 장관이나 육군 및 해군부 장관은 없었다. 네디치 정권 자체는 "국제법에 따른 지위가 없었고 독일이 위임한 권한 외에는 권력이 없었으며", "단순히 독일 점령 정권의 보조 기관이었다".
네디치 정부는 저항이 급격히 고조되는 시기에 임명되었다. 8월 31일 하루에만 영토 전체에서 철도역과 철도 노선을 대상으로 18건의 공격이 있었다. 8월 31일, 로즈니차시는 야다르 체트니크 부대에 의해 점령되었는데, 이는 파르티잔과의 상호 협력 협정의 일부였다. 리스트는 네디치의 임명에 대해 상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놀랐다. 그는 약간의 유보가 있었지만, '사실'을 받아들였다. 9월 1일, 그는 단켈만과 바더에게 반란 진압 명령을 내렸지만, 반란을 진압할 수 있는 네디치의 능력에 대한 단켈만의 낙관론을 공유하지 않았다.
네디치 정부는 세르비아인의 피가 흘러 세르비아를 조용하게 유지하는 정책을 표면적으로 가지고 있었다. 이 정권은 독일의 요구를 충실히 수행하여 나치에 의해 창설된 새로운 유럽 질서에서 세르비아의 자리를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네디치 정권이 사용한 선전은 네디치를 세르비아를 재건하고 국가를 구하기 위해 그의 역할을 받아들인 "세르비아의 아버지"로 묘사했다. 네디치 정부가 설립한 기관은 나치 독일의 기관과 유사했으며, 밀란 네디치가 서명한 문서는 국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서 따온 인종차별적인 용어를 사용했다. 선전은 세르비아 "인종"을 찬양하고, 그 "아리아인"을 받아들이고, 세르비아의 "생활권"이 무엇인지 결정했다. 그것은 청소년들에게 세르비아와 유럽의 새로운 질서를 건설하는 네디치를 따르라고 촉구했다. 네디치는 1941년 4월에 전쟁이 세르비아에게 끝났다는 것을 대중에게 확신시키고자 했다. 그는 자신의 시기를 "전쟁 후", 즉 평화, 진보, 평온의 시기로 인식했다. 네디치는 자신의 정부의 모든 행위가 점령자들에 의해 가능해졌으며, 사람들은 생명을 확보하고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는 데 있어서 명예로운 동료의 자리"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네디치는 그의 협력이 독일의 보복으로 인한 세르비아의 완전한 파괴를 막고 남은 세르비아를 구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는 개인적으로 유고슬라비아 망명 왕 페테르 2세와 연락을 유지하면서 왕에게 그가 또 다른 안테 파벨리치(크로아티아 우스타셰의 지도자)가 아니라고 확신시켰고, 네디치의 옹호자들은 그가 비시 프랑스의 필리프 페탱과 같다고 주장하면서(점령을 수락하면서 프랑스 국민을 방어했다고 주장), 그가 약한 괴뢰 정부를 이끌고 있다는 것을 부인했다.
3. 1. 11. 위기의 정점
네디치 정권이 임명된 직후 봉기는 위기의 정점에 달했다. 9월 초, 발레보 북쪽, 드리나 강과 사바 강 사이 지역은 무장과 지휘가 잘 된 반군 집단의 활동 중심지였다. 독일군과 세르비아 헌병대를 겨냥한 저격수들을 상대로 6개 중대가 투입되었다. 중대 중 하나는 코빌랴차에서 포위되어 고립되었고, 로즈니차 남서쪽, 드리나 강둑에 위치해 있었으며, 공중으로 탈출해야 했다. 그러나 독일군의 상황은 9월 1일, 크루파냐의 안티몬 공장 주둔군이 고립되면서 심각하게 악화되었다. 다음 날, 제704 보병 사단의 제724 보병 연대 소속 10중대와 11중대의 외곽 초소는 반군의 공격으로 크루파냐로 밀려났다. 반군은 주둔군에 항복을 요구했고, 마감 시간이 만료되자 9월 3일 00:30에서 06:00 사이에 두 중대의 주요 진지에 일련의 공격을 시작했다. 그날 저녁, 두 중대는 포위될 위험에 처해 있음을 깨닫고 다음 날 포위망을 돌파하려 했다. 10중대에서는 36명만이 발레보까지 갈 수 있었고, 11중대에서는 42명이 실종되었다. 총 9명이 사망하고 30명이 부상했으며 175명이 실종되었으며, 공중 지원에도 불구하고 두 중대 모두 피해를 입었다.
9월 4일, 리스트는 뵘에게 제164 보병 사단 소속 제433 보병 연대의 나머지 병력을 바더에게 넘겨주라고 지시했다. 결국 뵘은 제125 보병 연대와 제220 포병 연대에서 1개 대대를 이관했다. 바더는 또한 제164 보병 사단에서 제220 ''Panzerjaeger'' (대전차) 대대를 인수했다. 다음 날, 단켈만은 바더의 병력을 증강하기 위해 전선 사단을 투입할 수 없다면, 예비군에서 사단을 제공해달라고 요청했다. 다음 주에 반군은 기반 시설에 81건, 세르비아 헌병대에 175건, 독일군에 11건의 공격을 감행하여, 독일군은 30명이 추가로 사망하고 15명이 부상했으며 11명이 실종되었다. 그 주 동안, 리스트는 OKW에 뵘의 지휘에서 최근 이관된 병력을 포함하여 현재 투입된 병력으로는 반란을 진압하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조언했다. 그는 최소한 강력한 사단 1개와 탱크, 장갑차 및 장갑 열차를 가능한 한 빨리 세르비아로 이송할 것을 권고했고, 반군에 대한 모든 작전을 지휘할 단일 지휘관을 임명해달라고 요청했다.
3. 1. 12. 증원군의 도착
9월 14일, 리스트의 증원 요청은 마침내 OKH에 의해 승인되었다. 342 보병 사단은 프랑스 점령 임무에서 배치 명령을 받았으며, 프랑스군에게 노획한 소뮤아 S35/SOMUA S35프랑스어와 아치스 H35/Hotchkiss H35프랑스어 전차로 무장한 100 기갑 여단의 제202 기갑 연대 제1 대대도 바더의 지휘하에 배치되었다.
3. 2. 1942년
1941년 12월과 1942년 초, 예즈디미르 단기치를 포함한 동 보스니아의 체트니크 지도자들은 네디치 정부 및 베오그라드의 독일 군 수뇌부와 동맹을 맺고, 동 보스니아의 17개 지역을 분리하여 네디치의 세르비아에 합병하는 협상을 벌였다. 이 협상 과정에서 세르비아와 통합되기 전까지 자치를 목표로 하는 동 보스니아 임시 체트니크 행정부가 구성되었다. 당시 체트니크 운동은 ''"대(大) 세르비아"'' 건설의 초기 기반을 마련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였으나, 베를린에 대한 NDH 당국의 외교 활동으로 NDH의 국경 변경 시도는 저지되었다.
3. 3. 1943년
1943년 1월, 네디치는 세르비아를 위한 기본법 제정을 제안했다. 이는 디미트리예 료티치와 그의 전후 파시스트 유고슬라비아 국민 운동이 오랫동안 옹호해 온 것과 유사한 권위주의적 조합주의 국가를 만드는 헌법이었다. 바더는 각 기관장에게 의견을 물었고, 일부 전문가들은 채택을 권장했지만, 마이즈너는 독일의 이익에 위협이 된다고 보고 강력히 반대했다. 뢰어를 거쳐 히틀러에게 전달된 답변은 3월에 도착했는데, 히틀러는 이를 "시기적절하지 않다"고 여겼다. 네디치는 히틀러와 헤르만 노이바허와의 협상 동안 동 보스니아로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보스니아 체트니크 부대를 무장시키고 조직했다.[6] 미하일로비치의 가장 가까운 개인적 친구이자 협력자 중 한 명인 파블레 쥬리시치는 동시에 네디치의 지휘관을 맡았으며, 1943년 산자크 지역의 무슬림과 친 파르티잔을 몰살시키려 했다.[6] 그가 자행한 대량 학살은 1941년 크로아티아 독립국(NDH)에서 크로아티아 우스타셰와 무슬림이 세르비아인을 학살한 것과 비교되었다.[6] 네디치는 1943년 9월 18일 히틀러의 볼프스 란에서 히틀러와 독일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의 접견을 받았으며, 네디치는 동 보스니아, 몬테네그로, 산자크, 코소보-메토히야 및 스렘의 합병을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7]
독일군은 곧 세르비아인에 대한 대량 처형이 효과가 없고 역효과를 낳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는 그들이 인구를 반란군의 품으로 몰아넣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량 학살로 인해 네디치는 세르비아인에 대한 임의적인 총격 중단을 촉구했고, 뵘은 이에 동의하여 추가 통지가 있을 때까지 처형을 중단하라고 명령했다. 병사 1명이 사망했을 때 100명, 부상당했을 때 50명을 처형하는 비율은 1943년 2월에 절반으로 줄었고, 그 해 말에는 완전히 폐지되었다.
3. 4. 1944년
1944년 첫 6개월 동안,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은 드리나강과 림강을 넘어 여러 차례 침공하여 세르비아 서부와 남부 지역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러한 침공은 보스니아와 몬테네그로의 베테랑 부대로 현지 부대를 강화하고, 체트니크를 격파하며, 동쪽에서 붉은 군대가 도착할 것을 예상하여 유고슬라비아 인민 해방군(NOVJ)의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 이루어졌다.
3. 4. 1. 붕괴
1944년 가을 무렵, 동부 전선은 거의 세르비아에 도달했다. 세르비아 대부분은 붉은 군대,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불가리아군이 수행한 베오그라드 공세를 거치며 독일로부터 해방되었다. 붉은 군대와 파르티잔의 베오그라드 공세가 시작되면서, 행정부는 1944년 10월 세르비아에서 빈으로 철수했다.
독일이 세운 괴뢰 정부는 독일 점령 당국의 부속 기관에 불과했으며, 이 지역의 행정 일부를 관리하고 독일의 잔혹한 통치에 대한 책임을 공유했다. 그들은 추축국 내에서도 국제적인 지위를 갖지 못했다. 처음부터 매우 제한적이었던 그들의 권한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욱 축소되었으며, 특히 네디치에게 좌절감과 어려움을 안겨주었다. 네디치 정부가 독립 국가를 수립하려는 야망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은 존속 기간 동안 독일 군사 당국에 종속되었다.
실질적인 권력은 행정부의 군 사령관에게 있었으며, 이들은 독일군과 세르비아 협력 부대를 모두 통제했다. 1941년, 행정부의 군 사령관인 프란츠 뵈메는 게릴라의 독일군 공격에 대해 독일군의 대 파르티잔 정책에 따라 독일군 1명 사망 시 100명, 부상 시 50명을 살해하는 보복을 가했다. 최초의 보복 조치는 크라구예바츠 학살과 크랄레보 학살에서 국방군에 의해 자행되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독일군에게 역효과를 낳았으며, 네디치의 협력 정권을 지지하는 상당수의 세르비아인을 얻을 가능성을 망쳤다. 또한 크랄레보에서는 추축국을 위해 비행기를 건설하던 세르비아 노동자 그룹이 희생자 중 하나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학살로 인해 네디치는 세르비아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총격을 중단할 것을 촉구했고, 뵈메는 이에 동의하여 추가 통보가 있을 때까지 처형을 중단하라고 명령했다.
4. 지리
히틀러는 세르비아인들을 1941년 3월 27일 베오그라드 군사 쿠데타의 주요 선동자로 보고, 세르비아를 "잔여" 세력으로 축소하여 처벌하고자 했다. 추축국의 유고슬라비아 침공 당일, 히틀러는 "유고슬라비아 분할을 위한 임시 지침"을 통해 '알트 세르비엔'(구 세르비아, 발칸 전쟁 이전의 세르비아 왕국 영토)을 독일 점령 하에 두도록 지시했다.
히틀러는 루마니아 및 헝가리 정부와의 논의 후, 보이보디나 지역을 티사강을 기준으로 분할하기로 결정했다. 동부 지역(세르비아 바나트)은 "구 세르비아"와 함께 독일 점령 하에 놓였다. 티사강 서쪽의 보이보디나 지역은 헝가리에 점령되어 곧 헝가리에 병합되었다. 루마니아와 헝가리 사이의 경쟁만 바나트를 독일 점령 하에 두는 이유는 아니었다. 바나트에는 약 12만 명의 독일계 민족 (또는 ''폭스도이체'')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경제적으로도 중요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바나트의 경계는 티사강 외에도 남쪽의 도나우강이었으며, 북쪽과 동쪽에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유고슬라비아-루마니아 및 유고슬라비아-헝가리 국경이 있었다.
동부 시르미아 지역은 군사적, 경제적 이유로 처음에는 점령지에 포함되었는데, 특히 베오그라드의 공항과 라디오 방송국이 그곳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지역에 거주하는 독일계 주민(Volksdeutsche)의 수와 베오그라드에 식량을 공급하는 역할도 최초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이 초기 기간 동안 점령지와 NDH의 경계는 다뉴브 강변의 슬란카멘 마을과 사바 강변의 볼레브치 마을 사이를 지나갔다. 그러나 자그레브 주재 독일 대사 지크프리트 카셰의 지원을 받은 NDH의 압력에 따라, 세르비아 군정청의 군사 사령관의 승인을 받아 점차 NDH의 통제 하에 넘어가, 1941년 10월 10일에 NDH의 공식적인 일부가 되었으며, 제문과 스타라 파조바를 NDH 부카 주의 행정 구역으로 만들었다. 지역 독일계 주민들은 곧 이 지역을 독일의 통제 하에 반환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지역의 이관 결과로, NDH의 국경은 베오그라드 외곽까지 닿게 되었다.
점령 지역과 크로아티아 독립국 간의 서부 국경 대부분은 독일군에 의해 승인되었으며 1941년 6월 7일 안테 파벨리치에 의해 발표되었다. 그러나 승인된 국경선은 드리나강을 따라 바이나 바슈타까지만 해당되었고, 이 지점 이후 국경선은 확정되지 않았다. 1941년 7월 5일, 국경선은 브루스니차 지류와 합류하는 지점까지 드리나강을 따라 이어지고, 그 후 제믈리차 마을 동쪽에서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세르비아 국경을 따라 드리나강 동쪽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확정되었다.
산자크 지역은 처음에는 북쪽은 독일, 남쪽은 이탈리아에 의해 분할되었으며, 이 지역은 유고슬라비아를 독일과 이탈리아의 영향권으로 나누는 이른바 "빈 선"의 연장을 사용했다. 산자크를 가로지르는 점령지의 경계는 1941년 4월과 5월에 여러 번 빠르게 수정되어 결국 프리보이–노바 바로시–세니차–노비 파자르의 일반적인 선으로 정해졌지만, 루도, 프리보이, 노바 바로시, 세니차, 그리고 두가 폴랴나 마을은 이탈리아가 점령한 몬테네그로 쪽 국경에 있었다. 노비 파자르 마을은 독일의 손에 남아 있었다. NDH 정부는 독일이 이 지역의 더 넓은 부분을 점령할 경우 이를 달성하기가 더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산자크를 NDH에 합병하고 싶어 이러한 배치에 불만을 품었다.
독일 점령 지역과 이탈리아의 알바니아 사이의 경계선은 트레프차의 중요한 납과 아연 광산과 코소브스카 미트로비차-프리슈티나-우로셰바츠-카차니크-스코페를 잇는 주요 철도 노선 때문에 코소보 지역에서 상당한 이해 충돌을 야기했다. 결국 독일이 우세하여 "비엔나 라인"은 산자크의 노비 파자르에서 시작하여 코소브스카 미트로비차와 프리슈티나를 거쳐 프리슈티나와 우로셰바츠 사이의 철로를 따라 오늘날 북마케도니아의 테토보로 향한 후 북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오를로바 추카 인근의 불가리아에 병합된 지역과 만났다. 코소브스카 미트로비차, 부치트른, 라브 지역과 그라차니차 지역의 일부는 모두 독일 점령 지역에 속했다. 이 지역에는 벨로 브르도의 납 광산, 야그네니차 인근의 석면 광산, 부치트른 근처 두보바츠의 마그네사이트 광산을 포함한 여러 다른 중요한 광산이 있었다.
4. 1. 룸프 세르비아
히틀러는 세르비아인들을 1941년 3월 27일 베오그라드 군사 쿠데타의 주요 선동자로 보고, 세르비아를 "잔여" 세력으로 축소하여 처벌하고자 했다. 추축국의 유고슬라비아 침공 당일, 히틀러는 "유고슬라비아 분할을 위한 임시 지침"을 통해 '알트 세르비엔'(구 세르비아, 발칸 전쟁 이전의 세르비아 왕국 영토)을 독일 점령 하에 두도록 지시했다.4. 2. 바나트
히틀러는 루마니아 및 헝가리 정부와의 논의 후, 보이보디나 지역을 티사강을 기준으로 분할하기로 결정했다. 동부 지역(세르비아 바나트)은 "구 세르비아"와 함께 독일 점령 하에 놓였다. 티사강 서쪽의 보이보디나 지역은 헝가리에 점령되어 곧 헝가리에 병합되었다. 루마니아와 헝가리 사이의 경쟁만 바나트를 독일 점령 하에 두는 이유는 아니었다. 바나트에는 약 12만 명의 독일계 민족 (또는 ''폭스도이체'')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경제적으로도 중요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바나트의 경계는 티사강 외에도 남쪽의 도나우강이었으며, 북쪽과 동쪽에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유고슬라비아-루마니아 및 유고슬라비아-헝가리 국경이 있었다.4. 3. 시르미아
동부 시르미아 지역은 군사적, 경제적 이유로 처음에는 점령지에 포함되었는데, 특히 베오그라드의 공항과 라디오 방송국이 그곳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지역에 거주하는 독일계 주민(Volksdeutsche)의 수와 베오그라드에 식량을 공급하는 역할도 최초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이 초기 기간 동안 점령지와 NDH의 경계는 다뉴브 강변의 슬란카멘 마을과 사바 강변의 볼레브치 마을 사이를 지나갔다. 그러나 자그레브 주재 독일 대사 지크프리트 카셰의 지원을 받은 NDH의 압력에 따라, 세르비아 군정청의 군사 사령관의 승인을 받아 점차 NDH의 통제 하에 넘어가, 1941년 10월 10일에 NDH의 공식적인 일부가 되었으며, 제문과 스타라 파조바를 NDH 부카 주의 행정 구역으로 만들었다. 지역 독일계 주민들은 곧 이 지역을 독일의 통제 하에 반환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지역의 이관 결과로, NDH의 국경은 베오그라드 외곽까지 닿게 되었다.4. 4. 서부 국경
점령 지역과 크로아티아 독립국 간의 서부 국경 대부분은 독일군에 의해 승인되었으며 1941년 6월 7일 안테 파벨리치에 의해 발표되었다. 그러나 승인된 국경선은 드리나강을 따라 바이나 바슈타까지만 해당되었고, 이 지점 이후 국경선은 확정되지 않았다. 1941년 7월 5일, 국경선은 브루스니차 지류와 합류하는 지점까지 드리나강을 따라 이어지고, 그 후 제믈리차 마을 동쪽에서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세르비아 국경을 따라 드리나강 동쪽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확정되었다.4. 5. 산자크
산자크 지역은 처음에는 북쪽은 독일, 남쪽은 이탈리아에 의해 분할되었으며, 이 지역은 유고슬라비아를 독일과 이탈리아의 영향권으로 나누는 이른바 "빈 선"의 연장을 사용했다. 산자크를 가로지르는 점령지의 경계는 1941년 4월과 5월에 여러 번 빠르게 수정되어 결국 프리보이–노바 바로시–세니차–노비 파자르의 일반적인 선으로 정해졌지만, 루도, 프리보이, 노바 바로시, 세니차, 그리고 두가 폴랴나 마을은 이탈리아가 점령한 몬테네그로 쪽 국경에 있었다. 노비 파자르 마을은 독일의 손에 남아 있었다. NDH 정부는 독일이 이 지역의 더 넓은 부분을 점령할 경우 이를 달성하기가 더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산자크를 NDH에 합병하고 싶어 이러한 배치에 불만을 품었다.4. 6. 코소보
독일 점령 지역과 이탈리아의 알바니아 사이의 경계선은 트레프차의 중요한 납과 아연 광산과 코소브스카 미트로비차-프리슈티나-우로셰바츠-카차니크-스코페를 잇는 주요 철도 노선 때문에 코소보 지역에서 상당한 이해 충돌을 야기했다. 결국 독일이 우세하여 "비엔나 라인"은 산자크의 노비 파자르에서 시작하여 코소브스카 미트로비차와 프리슈티나를 거쳐 프리슈티나와 우로셰바츠 사이의 철로를 따라 오늘날 북마케도니아의 테토보로 향한 후 북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오를로바 추카 인근의 불가리아에 병합된 지역과 만났다. 코소브스카 미트로비차, 부치트른, 라브 지역과 그라차니차 지역의 일부는 모두 독일 점령 지역에 속했다. 이 지역에는 벨로 브르도의 납 광산, 야그네니차 인근의 석면 광산, 부치트른 근처 두보바츠의 마그네사이트 광산을 포함한 여러 다른 중요한 광산이 있었다.5. 행정
세르비아 영토는 독일이 군정을 실시한 유고슬라비아의 유일한 지역이었다. 이는 주요 수송로와 중요한 자원이 해당 영토 내에 위치했기 때문이었다. 독일은 괴뢰 정부를 세웠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세르비아 군정청(Militärverwaltung in Serbiende)에 있었다.
세르비아 군정청은 일상적인 행정 업무를 담당했다. 군정청은 경제, 경찰 부서 외에 두 개의 참모 부서로 구성되었다. 1942년 1월, 상급 SS 및 경찰 지도자가 임명되면서 경찰 부서가 추가되었다. 참모진의 경제 및 경찰 부서 책임자들은 이론적으로는 세르비아 군사령관에게 책임을 졌지만, 실제로는 베를린에 있는 각 부서의 책임자에게 직접 책임을 졌다.
5. 1. 행정 구역
독일군은 점령지 내에 4개의 군사 지역 사령부(펠트코만단투렌/Feldkommandanturende)를 설치했고, 각 지역 사령부는 하나 이상의 지구 사령부(크라이스코만단투렌/Kreiskommandanturende)로 세분화되었으며, 약 100개의 도시와 지역에는 지구 사령부의 통제를 받는 시/읍 사령부(플라츠코만단투렌 또는 오르츠코만단투렌/Platzkommandanturen or Ortskommandanturende)가 있었다. 각 지역 또는 지구 사령부는 지역의 요구에 따라 자체적인 군사, 행정, 경제, 경찰 및 기타 참모를 두어, 군정청장이 점령지 전체에 걸쳐 독일의 법령과 정책을 시행할 수 있도록 했다. 1941년 12월, 군정 지역은 해당 민정 지역과 일치하도록 조정되었다.바나트에는 처음에는 판체보에 지역 사령부(제610호)가 설치되었고, 벨리키 베체레크에는 지구 사령부(제823호)가 설치되었다. 판체보 지역 사령부는 이후 크랄레보로 이전되었지만, 벨리키 베체레크의 지구 사령부는 그대로 남아 군사 사령관에게 직접 보고하는 독립적인 지구 사령부가 되었다.
1941년 12월부터 독일군 철수까지, 독일 지역 사령부는 베오그라드, 니시, 샤바츠 및 크랄레보에 위치했으며, 지구 사령부는 다음과 같았다.
- 지역 사령부 제599 베오그라드: 지구 사령부 제378 포자레바츠.
- 지역 사령부 제809 니시: 지구 사령부 제857 자예차르 및 제867 레스코바츠.
- 지역 사령부 제816 샤바츠: 지구 사령부 제861 발레보.
- 지역 사령부 제610 크랄레보: 지구 사령부 제832 크라구예바츠, 제833 크루셰바츠, 제834 추프리야, 제838 코소브스카 미트로비차 및 제847 우지체.
독일 지역 및 지구 사령관은 세르비아 괴뢰 정부의 해당 대표를 지휘하고 감독했다.
괴뢰 정부는 이전 군사 지구와 경계가 동일한 오크루기 및 스레조비를 설치했다.


6. 군사
=== 추축국 점령군 ===
1941년 7월에 시작된 봉기로 인해, 독일군은 전투 병력을 세르비아 지역으로 다시 파견했다. 9월부터 그리스에 배치되었던 제125 보병 연대와 추가 포병 지원을 받았고, 같은 달 말에는 점령된 프랑스에서 제342 보병 사단이 도착했다. 제100 전차 여단의 분견대도 이 지역으로 보내졌다. 이 병력들은 10월 말까지 진압된 지역 북서부의 저항 세력에 대항하는 데 사용되었다. 남서부의 더 강력한 저항으로 인해, 제113 보병 사단이 동부 전선에서 11월에 도착하여 1941년 12월 초까지 진압하였다.
봉기가 진압된 후, 독일군은 전투 부대를 철수시키고 더 약한 수비 사단만을 남겨두었다. 1942년 1월, 제113 보병 사단은 동부 전선으로 복귀했고, 제342 보병 사단은 유격대에 대항하기 위해 NDH로 배치되었다. 철도, 고속도로 및 기타 기반 시설 확보를 위해 독일군은 점령된 지역의 넓은 지역에서 불가리아 점령군을 사용하기 시작했지만, 이 병력은 독일 지휘하에 있었다. 불가리아 제1 점령군단은 세 개의 사단으로 구성되어 1941년 12월 31일에 점령된 지역으로 이동했다. 이 군단은 처음에 바나트를 제외하고, 코소브스카 미트로비차와 크랄레보 사이의 서쪽의 이바르 강, 크랄레보와 차차크 사이의 서 모라바 강, 그리고 차차크에서 크라구예바츠를 거쳐 불가리아 국경까지 대략 동쪽으로 뻗어 있는 선으로 묶여 이 지역의 약 40%를 담당했다. 따라서 그들은 베오그라드-니시-소피아 및 니시-스코페 철도 노선, 그리고 주요 베오그라드-니시-스코페 고속도로의 대규모 구간을 담당했다.
1943년 1월, 불가리아 점령 지역은 서쪽으로 확장되어 이바르 강 서쪽과 차차크에서 점령된 몬테네그로 및 NDH 국경까지 대략 서쪽으로 뻗어 있는 선의 남쪽의 모든 지역을 포함했다. 이는 이 지역을 겨울 동안 수비하고 있던 제7 SS 의용 산악 사단 '프린츠 오이겐'을 해방시켜 NDH로 배치하여 유격대에 대항한 백색 작전에 참여하게 했다. 세르비아와 바나트 출신의 많은 Volksdeutsche들이 제7 SS 의용 산악 사단 '프린츠 오이겐'에서 복무했다.
1943년 7월, 불가리아 점령 구역은 북쪽으로 확장되어 제4 사단인 제25 사단이 NDH와 국경을 접하지 않는 이 지역의 나머지 지역(바나트 제외)에서 제297 보병 사단을 대신했다. 이 시점부터 독일군은 베오그라드 바로 주변 지역, NDH와 국경을 접하는 이 지역의 북서부 지역, 그리고 바나트만 직접 점령했다.
=== 협력 세력 ===
독일군은 질서 유지를 위해 현지 협력 세력에 의존했다. 주요 협력 세력은 세르비아 국가 방위군으로, 밀란 네디치 장군의 국민 구원 정부의 "정규군" 역할을 했다. 1941년 10월까지 독일 장비를 갖춘 세르비아군은 감독하에 저항에 점점 더 효과적으로 대응하게 되었다.
세르비아 국가 방위군 외에도, 세르비아 의용군, 러시아 군단, 그리고 러시아계 독일인으로 구성된 소규모의 보조 경찰 부대가 있었다. 또한 독일군은 코스타 페차낙의 체트니크 부대를 보조 세력으로 사용했는데, 이들은 1941년 8월 네디치 정부가 임명된 시점부터 독일과 협력하기 시작했다.
이들 중 가장 두드러진 세력은 파시스트 유고슬라비아 국민 운동(ZBOR)의 준군사조직과 지지자로 주로 구성된 세르비아 의용군이었다. 1941년에 창설된 이 부대는 1943년에 "세르비아 의용군"으로 개칭되었으며, 코스타 무시츠키가 작전 지휘관을 맡았다. 1944년 말, 군단은 무장 친위대로 이전되어 세르비아 SS 군단이 되었다. 러시아 군단은 1941년 9월 12일에 백계 러시아인 망명자에 의해 창설되었으며, 1944년까지 세르비아에서 활동했다.
페차낙에 충성하는 체트니크 그룹의 합류 이후 협력 세력으로의 모집이 증가했다. 1941년 말, 드라자 미하일로비치의 주요 체트니크 운동("조국 내 유고슬라비아 군")은 네디치 정부와 점점 더 이해하게 되었다. "합법화된" 체트니크 부대로서, 그들은 베오그라드의 괴뢰 정권과 협력했으며, 명목상으로는 미하일로비치 체트니크의 일부로 남아 있었다. 세르비아의 군사 상황이 악화되면서, 네디치는 미하일로비치와 점점 더 협력했다. 1944년 동안 체트니크는 자신들의 활동을 방해한 두 명의 고위 세르비아 군사 관계자를 암살했다.
=== 경찰 ===
점령 초기에 세르비아 군정청은 게슈타포, 형사 경찰, SD 또는 보안국 () 부대로 구성된 보안 경찰 특별 고용대 (Sicherheitspolizei Einsatzgruppende)를 배속받았다. 처음에는 SS 및 경찰 지도자()인 ''친위대 상급지도자 겸 경찰 대령'' 빌헬름 푹스가 지휘했으며, 이 부대는 기술적으로 세르비아 군정청장인 하랄트 터너의 통제를 받았지만, 실제로는 베를린에 직접 보고했다. 1942년 1월, 경찰 조직의 지위는 SS 상급지도자 겸 경찰 장군인 ''SS 상급집단지도자 겸 SS 소장'' 아우구스트 마이스너의 임명으로 격상되었다. 마이스너는 1944년 4월 ''SS 소장'' 헤르만 베렌츠로 교체되었다. 1차 베오그라드 특별 전투 부대도 참조.
6. 1. 추축국 점령군
1941년 7월에 시작된 봉기로 인해, 독일군은 전투 병력을 세르비아 지역으로 다시 파견했다. 9월부터 그리스에 배치되었던 제125 보병 연대와 추가 포병 지원을 받았고, 같은 달 말에는 점령된 프랑스에서 제342 보병 사단이 도착했다. 제100 전차 여단의 분견대도 이 지역으로 보내졌다. 이 병력들은 10월 말까지 진압된 지역 북서부의 저항 세력에 대항하는 데 사용되었다. 남서부의 더 강력한 저항으로 인해, 제113 보병 사단이 동부 전선에서 11월에 도착하여 1941년 12월 초까지 진압하였다.봉기가 진압된 후, 독일군은 전투 부대를 철수시키고 더 약한 수비 사단만을 남겨두었다. 1942년 1월, 제113 보병 사단은 동부 전선으로 복귀했고, 제342 보병 사단은 유격대에 대항하기 위해 NDH로 배치되었다. 철도, 고속도로 및 기타 기반 시설 확보를 위해 독일군은 점령된 지역의 넓은 지역에서 불가리아 점령군을 사용하기 시작했지만, 이 병력은 독일 지휘하에 있었다. 불가리아 제1 점령군단은 세 개의 사단으로 구성되어 1941년 12월 31일에 점령된 지역으로 이동했다. 이 군단은 처음에 바나트를 제외하고, 코소브스카 미트로비차와 크랄레보 사이의 서쪽의 이바르 강, 크랄레보와 차차크 사이의 서 모라바 강, 그리고 차차크에서 크라구예바츠를 거쳐 불가리아 국경까지 대략 동쪽으로 뻗어 있는 선으로 묶여 이 지역의 약 40%를 담당했다. 따라서 그들은 베오그라드-니시-소피아 및 니시-스코페 철도 노선, 그리고 주요 베오그라드-니시-스코페 고속도로의 대규모 구간을 담당했다.
1943년 1월, 불가리아 점령 지역은 서쪽으로 확장되어 이바르 강 서쪽과 차차크에서 점령된 몬테네그로 및 NDH 국경까지 대략 서쪽으로 뻗어 있는 선의 남쪽의 모든 지역을 포함했다. 이는 이 지역을 겨울 동안 수비하고 있던 제7 SS 의용 산악 사단 '프린츠 오이겐'을 해방시켜 NDH로 배치하여 유격대에 대항한 백색 작전에 참여하게 했다. 세르비아와 바나트 출신의 많은 Volksdeutsche들이 제7 SS 의용 산악 사단 '프린츠 오이겐'에서 복무했다.
1943년 7월, 불가리아 점령 구역은 북쪽으로 확장되어 제4 사단인 제25 사단이 NDH와 국경을 접하지 않는 이 지역의 나머지 지역(바나트 제외)에서 제297 보병 사단을 대신했다. 이 시점부터 독일군은 베오그라드 바로 주변 지역, NDH와 국경을 접하는 이 지역의 북서부 지역, 그리고 바나트만 직접 점령했다.
6. 2. 협력 세력
독일군은 질서 유지를 위해 현지 협력 세력에 의존했다. 주요 협력 세력은 세르비아 국가 방위군으로, 밀란 네디치 장군의 국민 구원 정부의 "정규군" 역할을 했다. 1941년 10월까지 독일 장비를 갖춘 세르비아군은 감독하에 저항에 점점 더 효과적으로 대응하게 되었다.세르비아 국가 방위군 외에도, 세르비아 의용군, 러시아 군단, 그리고 러시아계 독일인으로 구성된 소규모의 보조 경찰 부대가 있었다. 또한 독일군은 코스타 페차낙의 체트니크 부대를 보조 세력으로 사용했는데, 이들은 1941년 8월 네디치 정부가 임명된 시점부터 독일과 협력하기 시작했다.
이들 중 가장 두드러진 세력은 파시스트 유고슬라비아 국민 운동(ZBOR)의 준군사조직과 지지자로 주로 구성된 세르비아 의용군이었다. 1941년에 창설된 이 부대는 1943년에 "세르비아 의용군"으로 개칭되었으며, 코스타 무시츠키가 작전 지휘관을 맡았다. 1944년 말, 군단은 무장 친위대로 이전되어 세르비아 SS 군단이 되었다. 러시아 군단은 1941년 9월 12일에 백계 러시아인 망명자에 의해 창설되었으며, 1944년까지 세르비아에서 활동했다.
페차낙에 충성하는 체트니크 그룹의 합류 이후 협력 세력으로의 모집이 증가했다. 1941년 말, 드라자 미하일로비치의 주요 체트니크 운동("조국 내 유고슬라비아 군")은 네디치 정부와 점점 더 이해하게 되었다. "합법화된" 체트니크 부대로서, 그들은 베오그라드의 괴뢰 정권과 협력했으며, 명목상으로는 미하일로비치 체트니크의 일부로 남아 있었다. 세르비아의 군사 상황이 악화되면서, 네디치는 미하일로비치와 점점 더 협력했다. 1944년 동안 체트니크는 자신들의 활동을 방해한 두 명의 고위 세르비아 군사 관계자를 암살했다.
6. 3. 경찰
점령 초기에 세르비아 군정청은 게슈타포, 형사 경찰, SD 또는 보안국 () 부대로 구성된 보안 경찰 특별 고용대 (Sicherheitspolizei Einsatzgruppende)를 배속받았다. 처음에는 SS 및 경찰 지도자()인 ''친위대 상급지도자 겸 경찰 대령'' 빌헬름 푹스가 지휘했으며, 이 부대는 기술적으로 세르비아 군정청장인 하랄트 터너의 통제를 받았지만, 실제로는 베를린에 직접 보고했다. 1942년 1월, 경찰 조직의 지위는 SS 상급지도자 겸 경찰 장군인 ''SS 상급집단지도자 겸 SS 소장'' 아우구스트 마이스너의 임명으로 격상되었다. 마이스너는 1944년 4월 ''SS 소장'' 헤르만 베렌츠로 교체되었다. 1차 베오그라드 특별 전투 부대도 참조.7. 인구
점령지의 인구는 약 381만 명으로 추산되었으며, 주로 세르비아인과 독일인으로 구성되었다. 1942년 여름까지 약 40만 명의 세르비아인이 점령지에 거주하고 있었다. 바나트 자치 지역은 다민족 지역으로 세르비아인, 독일인, 헝가리인, 루마니아인, 슬로바키아인 등으로 구성되었다.
세르비아와 바나트에 거주하던 유대인 대부분은 살해되었다. 1941년부터 1944년까지 강제 수용소에서 약 8만 명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세르비아는 유럽에서 유대인이 없는 "Judenfrei" 국가로 선포되었다.
8. 경제
8. 1. 은행과 통화
유고슬라비아의 붕괴 이후, 유고슬라비아 국립은행은 1941년 5월 29일 청산되었고, 이틀 후 세르비아 군정청은 세르비아 국립은행을 설립하는 포고령을 발표했다. 새로운 은행은 경제 문제 전권 대사인 프란츠 노이하우젠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았으며, 그는 은행의 총재와 이사, 그리고 은행에서 노이하우젠을 대표하고 모든 중요한 거래를 승인해야 하는 독일 위원을 임명했다. 새로운 은행은 유일한 법정 통화로 세르비아 디나르를 도입하고 모든 유고슬라비아 디나르를 교환하도록 소환했다.전통적인 오브레노비치 문장이 왕관을 제외한 지폐와 동전에 나타났다.
전쟁 후 유고슬라비아는 1945년에 세르비아 디나르와 크로아티아 독립국 및 몬테네그로의 다른 통화를 폐지했다.
8. 2. 독일의 경제 착취
독일군은 유고슬라비아 항복 직후, 세르비아 점령 지역에서 약 20억 디나르를 포함하여 패배한 유고슬라비아군의 모든 자산을 몰수했다. 모든 사용 가능한 원자재를 압수하고 점령 화폐를 사용하여 해당 지역에서 이용 가능한 물품을 구매했다. 이후, 독일군은 국내의 모든 유용한 군사 생산 자산을 통제하에 두었고, 이들을 모두 해체하여 영외로 이전했다.점령 당국은 도나우 강에서의 강 운송을 포함한 모든 운송 및 통신 시스템을 통제했다. 침공 이전에 이미 추축국의 통제하에 있지 않았던 해당 지역의 모든 주요 광업, 산업 및 금융 기업을 통제했다.
세르비아 경제의 최대 착취를 위해, 독일군은 프란츠 노이하우젠을 임명했다. 그는 괴링 휘하의 4개년 계획 전권 대사 등을 역임하였다. 1943년 10월부터 그는 세르비아 군정청장이 되어 세르비아 경제와 금융을 완전히 통제했으며, 세르비아 국립 은행을 통해 독일의 전쟁 노력을 지원했다.
독일군은 세르비아 영토에 막대한 점령 비용을 부과했는데, 여기에는 국방군이 결정한 영토의 군사 행정 운영에 필요한 금액과 제국에 대한 추가 연간 기여금이 포함되었다. 점령 비용은 세르비아 재무부가 세르비아 국립 은행의 특별 계좌로 매월 지급했다. 점령 기간 전체에 걸쳐 세르비아 괴뢰 정부는 독일군에게 약 332억 4800만 디나르의 점령 비용을 지불했다. 점령 비용은 1944년 중반까지 해당 지역의 현재 국민 소득의 약 40%에 달했다.
9. 문화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해체되면서 많은 신문이 폐간되고 새로운 신문이 창간되었다. 독일 점령 당국은 모든 인쇄 장비의 등록을 요구하고 출판물에 대한 제한을 명령했으며, 당국의 등록 및 승인을 받은 신문만이 간행물을 편집할 수 있었다. 1941년 5월 16일, 최초의 새로운 일간지인 ''노보 브레메'' (새로운 시대/Novo vremesr)가 창간되었다. 파시스트 정당 ZBOR는 1941년에 주간지 ''나사 보르바'' (우리의 투쟁/Naša borbasr)를 창간했는데, 그 제목은 히틀러의 ''나의 투쟁''(Mein Kampf)을 연상시켰다. 정권 자체는 유고슬라비아 왕국에서 발행되었던 동명의 공식 간행물의 전통을 잇고자 ''슬루즈베네 노비네'' (관보/Službene novinesr)를 발행했다.
세르비아의 영화 상황은 유고슬라비아에 비해 다소 개선되었다. 당시 베오그라드에는 영화관 수가 21개로 늘어났으며, 일일 관람객 수는 12,000명에서 15,000명 사이였다. 가장 인기 있는 두 편의 영화는 1943년작 ''네비노스트 베즈 자시테'' (보호받지 못한 순수/Nevinost bez zaštitesr)와 ''골든 시티''였으며, 각각 62,000명과 108,000명이 관람했다.
독일 점령 당국은 유대인을 배제하는 극장 및 기타 오락 시설의 개설을 규제하는 특별 명령을 내렸다. 베오그라드의 세르비아 국립 극장은 이 기간 동안 계속 문을 열었다. 이 기간 동안 공연된 작품으로는 ''라 보엠'', ''피가로의 결혼'', ''마탄의 사수'', ''토스카'' 등이 있다.
10. 인종 박해
점령된 모든 지역에 인종 차별법이 도입되어 유대인과 로마인에게 즉각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나치즘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투옥시켰다. 세르비아에는 여러 강제 수용소가 설립되었으며, 1942년 반 프리메이슨 전시회에서 베오그라드는 유대인 부재(''Judenfrei'') 도시로 선포되었다. 1942년 4월 1일, 세르비아 게슈타포가 결성되었다. 1941년에서 1944년 사이에 점령 지역의 나치 운영 강제 수용소에 약 12만 명이 억류되었다. 이 기간 동안 5만에서 8만 명이 사망했다. 반지차 강제 수용소는 독일군과 네디치의 정권이 공동으로 운영했다.[3] 세르비아는 에스토니아에 이어 ''Judenfrei''(유대인 부재)로 선포된 유럽의 두 번째 국가가 되었다. 세르비아 유대인 약 14,500명(세르비아 유대인 인구 16,000명의 90%)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살해되었다.
협력주의 무장 부대는 유대인, 로마인, 반독일 저항에 가담하거나 그러한 저항의 혐의를 받는 세르비아인들을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대량 학살하는 데 연루되었다. 이 부대는 또한 많은 크로아티아인과 무슬림의 살해에 책임이 있었다. 그러나 점령지에서 피난처를 찾은 일부 크로아티아인은 차별을 받지 않았다. 전쟁 후, 세르비아 지도자들은 이러한 사건의 많은 부분에서 세르비아의 연루와 세르비아의 협력 문제를 역사적 수정주의의 대상으로 삼았다.
점령지에 설립된 강제 수용소는 다음과 같다.
- 반지차 강제 수용소 (베오그라드)
- 크르베니 크르스트 강제 수용소 (니시)
- 토포브스케 슈페 (베오그라드)
- 샤바츠 강제 수용소
베오그라드 외곽에 위치한 사지미스테 강제 수용소는 실제로 크로아티아 독립국의 영토에 위치해 있었다.
11. 전후 재판
가장 두드러진 세르비아 협력자들은 재판을 받기 전에 사망했다. 디미트리예 료티치/디미트리예 료티치sr는 1945년 4월 슬로베니아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고, 밀란 아치모비치/밀란 아치모비치sr는 젤렌고라 전투에서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에게 살해당했다. 밀란 네디치/밀란 네디치sr는 1946년 초 유고슬라비아로 인도되었지만 재판을 받기 전에 감옥에서 사망했다. 베오그라드에 도착한 후 파르티잔은 1944년 11월 27일에 라도슬라브 베셀리노비치, 두샨 조르제비치, 욤칠로 얀코비치, 체도미르 마르야노비치, 요반 미유슈코비치를 처형했다. 네디치 정부의 장관들은 체트니크 지도자 드라자 미하일로비치를 상대로 진행된 동일한 재판의 일환으로 함께 재판을 받았다. 코스타 무시츠키, 타나시에 디니치, 벨리보르 요니치, 드라코미르 요바노비치, 듀라 도키치는 1946년 7월 17일에 처형되었다.
정부의 일부 구성원은 해외로 도피하여 재판을 받지 않았다. 여기에는 미국으로 이주한 코스티치, 프랑스로 간 보리보예 요니치, 독일로 이주한 미오드라그 다미야노비치가 포함되었다.
뵘은 세르비아에서 저지른 범죄로 인질 재판을 받기 전에 자살했다. 하랄트 터너는 1947년 3월 9일 베오그라드에서 처형되었다. 하인리히 단켈만과 프란츠 노이하우젠은 1947년 10월에 함께 재판을 받았다. 단켈만은 이후 처형되었고 노이하우젠은 20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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